교육연한은 일정하지 않아서 대략 40세까지는 교생의 신분을 가질 수 있으며, 양반이 아닌 평민들도 향교에 입학하여 東西齋에 기숙하며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 칠원향교와 사족 사족들의 동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써 鄕案과 靑衿錄, 齋薦案 등이 전하고 있다. 칠원향교의 청금록은 성책의 형태로 4건이 남아있는데, 「靑襟錄」으로 명명하였다. 따라서 칠원향교의 청금록은 유생의 명단이 아닌 향교 임원과 향교 부설 강회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이라 하겠다. 협조사항을 요청한 문서로는 감모궁 건립비용 모금, 궐리지 간행비용 등의 모금을 독려해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 3건, 영당건립과 관련된 내용 1건, 사회 기강과 관련된 내용 1건 그리고 향교 향사에 참여할 임원의 명단을 보고하는 문서 1건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인근 서원과 향교에서 주관하는 문집의 중간에 협조를 요청하는 문서 6건을 비롯하여 모금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산송 등의 소송과 관련하여 공론을 조성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문서 3건이 있다. 또 한말의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향교의 역할과 관련하여 1895년과 1896년 진주 안동 등의 창의소에서 동참을 독려한 문서와 을사조약체결 후에 순절한 의사를 위한 원우 건립 모금관련 문서 7건 등이 있다.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침체하면서는 문묘에 대한 향사가 향교의 주된 기능이 되었다. 향교는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 백성들을 상대로 한 사회교화 등의 기능에 앞서 문묘에 대한 享祀가 주된 기능이었다. 조선 전기 향교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은, 교육이 목적이 아니라 다만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향교에 투탁하는 비리가 빈번히 발생하여 향교가 쇠락하는 중요한 요인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각각 문중에서 최진립에 대하여 표창을 요청하기 위하여 국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에 대한 초본, 그리고 경주내 읍지에 대한 기록을 둘러싸고 이 문중과 기타 여러 문중 사람들이 보냈던 單子 등의 필사본이 있다. 유안류에는 읍지에 부록으로 남아있는 1618년부터 1644년까지의 향안과 청금록, 재천안 등이 전한다.次下의 성적을 받은 것 2점, 次上의 성적을 받은 것 1점 등이 있다. 향교 소속 토지인 校田은 노비나 庫直 같은 使役人에 의해 耕食된 것 이외는 양반ㆍ평민ㆍ노비들에 의해 소작되었다. 향교에서는 이러한 분담금을 儒戶에 부과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부당하게 여긴 유생들은 고을의 民庫에서 부담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칠원향교에는 모두 4건의 전령(훈령 포함)이 전하는데, 산송과 관련하여 該邑의 役丁을 조발하도록 명령한 문서 2건과 관내 건축 및 문집 간행비 분담금을 독촉하는 문서 2건이다. 帖文(帖諭)는 관부의 장이 屬官에게 내리는 문서로서 칠원향교의 경우는 관찰사 또는 군수가 향교에 발급한 문서들이다. 회계 및 기록류에는 대성전을 비롯한 향교 건물을 중수, 보수하기 위한 비용의 모금과 사용경비의 내역을 기록한 것, 권학을 위한 흥학재의 운영비용 마련을 위한 모금과 그 운용에 관련한 절목, 향교의 주요 기능인 향사와 관련하여 각 제례의 절차와 소요되는 제수 물목, 제수마련에 소요된 비용 등을 정리한 내용, 그리고 향교의 수입 및 지출에 관련된 기록 등이 전하고 있다.

조선전기 이래 이러한 향교 운영의 대부분은 국가에서 내려준 토지와 노비로 충당하여왔다. 통문의 대부분이 동류 혹은 관계기관으로부터의 협조 요청이며 협조의 대부분은 비용의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조선 후기 양반의 분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인근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양반 후손들의 신분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협조문이 3건이 있다. 즉 부산경남지역 전통 사찰들의 교육사업은 단순히 승려 교육이나 신도 교육 등 불교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통 사찰 인근 지역주민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김굉의 상소나 그에게 내려진 유지의 내용은 그대로 조선왕조실록에 전재될 정도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초기에 서당 형태로 운영되던 신안서사가 현재의 위치인 嘉谷에 자리잡은 시기는 영조 15년(1739)이었으며, 당시 서당의 이름은 부근에 있는 新安江의 이름을 딴 ‘新安菴’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3면의 산이 마을을 향해 揖을 하고 있으며, 裨補說에 입각하여 송림을 조성, 북쪽의 공백을 메웠다고 한다. 이 일기는 그 작성연대가 1830년에서 90년까지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 있으며, 특히 1876년 개항을 전후한 시기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항이 향촌사회에 미친 충격을 파악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전오피 지급의 경우 실제로는 노비가 지급되지 않은 향교도 있으며, 군역을 피하기 위해 부담을 감수하고 향교에 투탁하는 노비도 생겨났다. 한편으로는 정원 외의 교생인 액외(額外)교생을 대다수 모집하여 불법으로 향교에 들어가 군역을 면제받고, 향교의 재정을 보충할 재원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들의 입학을 허가하였던 것이다.

성책류는 향교의 운영과 관련된 각종 기록류가 포함된다. 상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척사와 관련된 내용이다. 품목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흥학재 관련 내용이다. 특히 20세기 초반에 집중되어 있으며 관주도의 신교육기관인 낙육고등학교의 지원과 관련된 내용이다. 다음으로 대부분의 통문은 다른 지역의 향교나 순영의 낙육재, 그리고 유도회 등으로부터 행사의 연락이나 협조를 요청받은 내용이다. 근대적 신교육제도로의 전환을 위해 관찰사 또는 군수는 향교나 서당에서의 구식 교육기관의 재산과 인원을 근대적인 교육제도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흥학재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림양성과 결집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居接을 통한 학술활동의 진작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를 수호하거나 제향시의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교생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의 향교를 대상으로 한 재정 지원의 호가대는 토지 부족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특히 소장자료 156점은 개인이 평생에 걸쳐서 수집한 것이므로, 한 개인 또는 종중에서 소장되었던 자료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나 칠곡군은 개인 자료 소장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 사료군의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 자료 조사 수집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도에 수행된 경북 영주 지역사 자료 조사 수집 연구 용역(연구 책임자 : 노대환)의 결과로 수집된 자료들이다. 이 자료는 居昌君 加祚面 屛山에 세거한 密陽卞氏 家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이다. 이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간찰이나 선물물목, 부조기 등에 운현궁이 언급되고 있다.